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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조광한 경기도 남양주 시장선거 실패,곧 국가의 실패=23
  • 신형수 기자
  • 승인 2021.07.26 15:47
  •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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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조광한 경기도 남양주 시장
우리 역사에서 가장 광대한 영토를 개척하고 700년을 번창한 나라가 고구려입니다. 그러나 연개소문의 반란과 잔혹한 공포통치로 인해 멸망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주몽왕이 건국했고, 전성기는 광개토대왕과 그의 아들 장수왕 때였습니다. 당시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강성했고 스스로 ‘천하의 중심'이라고 생각할 만큼 강한 자부심을 가진 나라였습니다.

이렇게 강성했던 고구려가 600년대에 와서 힘을 잃기 시작합니다.

612년 수나라는 113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략합니다. 요동성을 함락하지 못하자 정예병 30만 명이 요동성을 우회해 평양성을 향해 진격했습니다. 그러나 살수, 지금의 청천강에서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를 격파합니다. 30만 명 중에 살아서 돌아간 병사가 2,700명에 불과했습니다. 바로 오늘(7월 24일)이 역사적으로 가장 통쾌한 ‘살수대첩’ 전승일 입니다.

수나라는 고구려 정복에 실패하고 내부 동요가 일어나면서 곧 멸망해 618년 당나라가 들어섰고, 고구려 또한 전쟁에는 승리했지만 국력에 큰 소모를 입었습니다.

국가적으로 이런 어려운 상황속에 연개소문이 고구려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됩니다.

연개소문은 15세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동부대인 대대로’가 되었습니다. 당시는 귀족제 사회로 아버지의 직책을 아들이 승계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연개소문이 아버지의 지위를 계승할 때, 귀족들은 그의 성품이 포악하다는 이유로  심하게 반대했지만 교묘한 술책으로 이어받았습니다. ‘삼국사기’는 그의 성품이 포악하고 잔인했고 칼을 다섯 자루나 차고 다녔으며, 사람들이 두려워 감히 똑바로 보지 못했다고 기록했습니다.

한편 새롭게 중국을 통치한 당나라는 626년에 왕자 이세민이 형제들을 죽이고 아버지를 위협해 왕위를 물려받았고, 팽창정책을 펼치면서고구려와의 사이에 긴장감이 높아졌습니다. 당나라는 무리한 요구를 해왔지만 영류왕과 귀족들은 신흥 강국인 당나라의 요구를 적당히 들어주며 외교적인 해법으로 전쟁은 피하려고 했습니다.

반면에 30여 년 전 수나라의 침략을 물리친 자부심을 가진 고구려의 군부와 무장 세력들은 이런 영류왕의 정책에 반발했고 연개소문과 그의 무리들은 대당 강경파의 선봉이었습니다.

대대로에 오른 연개소문이 당나라에 대한 강경한 태도를 바꾸지 않았고, 천리장성 축조에 힘을 쏟으며 세를 불리자 전쟁을 염려한 영류왕과 귀족들은 그를 매우 위험한 인물로 판단하고
제거하려 하지만 연개소문이 선수를 치고 반란을 일으킵니다.

642년 가을, 연개소문은 대대적인 군대 사열식을 개최하고 수많은 귀족을 초대합니다.식이 거행되는 도중 연개소문과 부하들은 귀족 100여 명을 참살하고 곧바로 궁으로 달려가 영류왕을 시해하고 시신을 토막 내 시궁창에 던져버렸습니다.

정권을 장악한 연개소문은 영류왕의 조카를 새로운 왕으로 삼아 보장왕이라 하고, 자신은 인사권과 군사권을 총괄하는 대막리지에 올라 왕권을 능가하는 독재를 하고 공포를 조장하는 무소불위의 공포통치를 하며 나라를 좌지우지했습니다.

그러자 당태종 이세민은 보장왕 4년인 645년에 17만의 병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쳐들어왔습니다.연개소문이 죽인 영류왕의 원한을 갚고, 당나라의 신하국인 신라를 돕는다는 명분이었습니다. 전생의 신으로 불렸던 당태종은 수나라도 점령하지 못했던 요동성을 점령하고 만주의 안시성을 공략했습니다.

안시성 성주 양만춘은 연개소문이 반란으로 정권을 장악했을 때 복종하지 않았고 이에 연개소문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안시성을 공격했으나 함락하지 못하자 어쩔수 없이 안시성 성주의 직책을 그대로 맡긴 용기와 소신의 인물입니다.

당군은 60일을 공격해도 성을 함락하지 못하자, 높은 흙산을 쌓아 공략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내린 큰비에 거대하게 쌓아 올린 흙산이 허물어졌고, 이때를 틈탄 고구려군이 흙산을 점령하자 당태종은 철수하게 됩니다.

안시성 전투에서 눈에 화살을 맞은 당태종은 시름시름 앓다가 “나의 자식들은 어떤 경우라도 고구려를 공격하지 마라. 오히려 당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이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그의 유언에 따라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하여 먼저 백제를 공략한 후에 고구려를 치기로 작전을 변경했습니다. 660년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661년에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고구려는 이때의 공격은 겨우 막아냅니다.

하지만 연이은 전쟁과 연개소문의 독재와 독선, 공포정치와 외교적인 고립으로 국력은 이미 크게 쇠퇴했고, 663년에 그가 죽자 그의 동생과 아들들은 권력싸움에 몰두하며 멸망의 길로 접어듭니다. 이 싸움에서 밀려난 연개소문의 동생은 신라에 항복했고, 큰 아들은 당에 투항했습니다.

국력의 쇠퇴와 내부의 분열로 고구려의 힘은 급격히 위축됐고, 668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고구려는 멸망하고 700년 역사는 막을 내렸습니다. 

‘삼국사기’는 연개소문을 임금을 죽인 역적이며, 독단과 전횡으로 고구려의 멸망을 초래한 장본인이라고 했습니다. 독재와 독선이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피폐하게 하고, 쇠망하게 만드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연개소문의 반란과 잔혹한 독재와 전횡이 없었다면 우리나라가 광활한 만주 땅을 잃어버리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요?

다음에는 후고구려를 개국했던 궁예의 포악함을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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